한국에서는 “회사에
가고 싶다.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하면 그것이
좋은 의미이건 아니건 ‘워커홀릭’ 취급을 받는다. 업무(워크)를 과도하게
하면 삶(라이프)를 소홀히 해서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이 무너지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싫어한다. “무슨 문제 있나?”는 소리 듣기 쉽다. 하지만 실리콘밸리 직원들은 “회사에 가고 싶다. 회사에 가는 게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서도 미친놈 취급을 받거나 ‘과도한 충성파’로 찍히지도 않는다. 그저 그런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어떻게 이런 문화를 만들어냈을까? 실리콘밸리는 '직원 천국'으로
불린다. 구글이 대표적 사례다. 놀이터처럼 생긴 사옥에서
일하며 자유롭게 출근/퇴근하고 전 직원이 공짜로 점심을 먹는다. 거기다
고연봉이다. 얼토당토 않은 지시도 없고 갑질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집에서 일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어린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일찍 퇴근해도 된다. 회의를 자주 하지만 시간 낭비한다는 느낌도 없다. 해외 출장도 잦고
해당 지역 오피스에서 근무할 수도 있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구글 직원은 이렇게 일을 한다. '직원 천국'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다.
한국의 많은 기업과 임직원들이 실리콘밸리에서 구글의 모습을 보고
“우리도 이렇게 하자”면서 벤치마킹하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임원들은 직원들의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일하는 면에 매료되고 직원들은 회사의 복지 시스템과 근무 환경에 관심을 둔다. 하지만 구글의
일하는 방식은 일 중심의 문화에서 비롯한 것이다.
◆공짜 점심에 담긴 뜻
'놀이터처럼 생긴
사옥'은 직원들에게 “일하지 말고 맘껏 놀아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창의적 사고를 끌어 올리기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창업정신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레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이 1998년 허름한 창고에서 창업해 오늘의 구글을
만든 정신을 잊지 말고 일하라는 뜻이다.
'자유로운 출퇴근
시간'은 실리콘밸리 교통 사정 때문에 정착한 것이다.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극심하게 밀리는 고속도로에 갇혀서 출퇴근에 1~2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자유롭게 출퇴근해서 생산성을 끌어 올리라는 것이다.
집에서 일하건 회사에서 일하건 상관하지 않는다. 실리콘밸리 엔지니어들은 보통 회의 시간에
출근 시간을 맞추기도 한다. 구글의 경우엔 마운틴뷰, 샌프란시스코
등 실리콘밸리 전 지역에 오피스가 있다. '특정 공간'에
출퇴근 하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구글의 '공짜 점심'은 유명하다. 구글이 공짜로 직원에게 무료로 밥을 주는 문화를 확산시키면서
실리콘밸리의 대표적 기업 문화로 자리잡았다. 그렇다고 실리콘밸리 모든 기업이 공짜로 직원에게 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삼성전자 같은 경우엔 저렴하게 직원들에게 점심을 제공하지만 애플과 아마존은
인근 지역 식당 가격과 거의 다름없이 받는다.
구글이 무료 점심을 주기로 한 것은 “회사 밖으로 나가서 먹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 주차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점심을 회사 안에서 해결하면 그만큼의 시간을 아낄 수 있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일'에 최적화된 문화인 것이다.
실리콘밸리 기업의 생산성은 역대 최고 수준이다. 구글(알파벳)은 지난 1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6% 증가한 311억6000만달러(33조5500억원)를 기록했고 페이스북은 49% 늘어난 119억6000만달러(12조9108억원)를 기록했다. 구글
직원은 7만2053명, 페이스북
직원은 2만5105명 수준에 불과하다.
◆고연봉에 따른 책임 명확
구글 직원의 연봉 수준은 잘 알려진 대로 매우 높은 편이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의 미국 대기업 중간연봉
패키지 보고서를 인용한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구글 직원은 19만7000달러(2억1000만원)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중간연봉은 전체 직원을 연봉순으로 나열했을 때 중간에 해당하는 사람이 받는 연봉을 뜻하는데
S&P500지수에 속한 379개 기업 가운데 구글은 4위를 기록했다. 실리콘밸리 기업 전체의 평균 연봉도 12만달러(1억3024만원)에 달한다. 이는 미국 전체 기업의 평균 연봉(5만1970달러)에 비해서도
크게 높다. 높은 성과에 따른 주식·스톡옵션도 상당하다.
대신 임직원이 지는 '책임'도 상당히 무겁다. 실리콘밸리 기업 임직원들은 회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밤낮없이 프로젝트에 매달리는 것이 보통이다. 더구나 노조가 없고 해고가 자유롭다. 넷플릭스는 실리콘밸리에서도 직원에게 최고 연봉을 줄 뿐만 아니라 최소 6주
휴가를 보장하는 등 자유로운 기업 문화로 유명하지만 프로젝트 상황에 따라 가차 없이 해고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실리콘밸리는 기술 변화가 빠르다 보니 500~1000명 수준의 사업부 전체를 해고하는 사례도 많다. 2013년부터
최근까지 클라우드컴퓨팅, 인공지능이 주류 기술로 정착함에 따라
IBM, HP, 오라클, 시스코, 인텔, 야후 등 전통 강자들은 임직원 대량 해고를 단행해야 했다. 해고를
당하더라도 사회안전망이 없어 이에 따른 결과는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 이 같은 노동 환경 때문에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은
포천지가 최근 발표한 2018년 '일하기 좋은 직장' 순위 100위권에조차 올라가지 못했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는 '일과 삶의 균형(Work life balance)'에 대해 "이 단어는 일과 삶이 서로 경쟁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 일과 삶은 서로 유기적으로 맞물려 공존해야 한다"면서 '워라밸'이 아닌 '워라클(Work Life Circle)'이라는 단어를 쓰자고 제안했을 정도다.
◆긱 이노코미 문화도 영향 줘
실리콘밸리는 우버·에어비앤비
등 공유경제 기업들의 본사가 있고, 관련 서비스도 가장 먼저 시작한 지역이다. 이처럼 기업이나 개인에게 필요한 일을 하고 돈을 받는 일자리를 말하는 '긱
이코노미(Gig Economy)'의 성장이 실리콘밸리에 미친 영향도 크다.
긱은 1920년대
미국 재즈 공연장 주변에서 필요할 때마다 연주자를 구해서 단기간으로 공연 계약을 맺던 것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비정규직이지만 형식적으로는 개인사업자이고 계약사업주에게 노동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독립노동자'로 구분된다.
긱 이코노미는 직업 안정성은 떨어지지만 필요한 만큼 일하고 업무시간을
스스로 조정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나인 투 파이브(9 to
5)'가 상징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시간 개념이 무너지는 데 기폭제가 되고 있다.
긱 이코노미가 확산하고 있는 이유는 일한 만큼 버는 대신 스스로
업무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우버 드라이버들은 가장 큰 장점으로 '일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있는 유연한 근무시간'을 첫 손가락에 꼽는다.
근무시간이 유연한 덕분에 생산성이 높다는 것도 장점이다. 실제로 긱 노동자들의 시간당 임금은 전체 노동자 평균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고 한다. 폴 오이어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연구에 따르면 긱 노동자의 연봉은 전체 평균보다 6% 정도 낮았지만 시간당 임금을 따져보면 전체 평균보다 15% 높았다.
유연한 근무시간은 여성 전문직이나 엔지니어에게도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육아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긱 이코노미가 수익과 시간을 동시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장점 덕분에 미국에서는 긱 이코노미와 긱 노동자 범위도 넓어지고 있다. 차량(우버·리프트)이나 숙박(에어비앤비) 외에도
집안일, 사무실 청소, 전문 엔지니어, 변호사 등 다양한 직종으로 확산돼 있다. 현재 미국 노동자의 약 35%는 직·간접적인
긱 노동자로 분류될 정도다.
◆실리콘밸리의 일하는 방식
실리콘밸리 노동 환경은 실은
'가혹하다'고 볼 수 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직원과 체결하는 노동계약서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업무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이를
그대로 지키는 회사와 직원은 많지 않다. 프로젝트 성패와 시간에 따라 주당 70시간 이상 업무를 처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리콘밸리에서 이처럼
유연근무가 가능한 것은 미국 노동법상 '시간 외 수당 면제직원(exempt
employees)' 규정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미국 노동법은 주별로 다른데,
캘리포니아에서는 근로자를 '시간 외 수당 근로자'와 '시간 외 수당 면제직원'으로 구분하고 있다. 계약직과 단순 업무 종사자들은 시간 외 수당 근로자로 구분된다. 이들의
근무시간은 주 40시간으로, 이를 초과해 근무하면 기존 임금의 1.5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초과수당으로 받는다. 초과근로를 포함한
노동시간은 주 72시간을 넘을 수 없다.
실리콘밸리 임원과 전문직, 세일즈
직군은 시간 외 수당 면제직원으로 노동시간에 대한 제약이 없다. 노동시간과 무관하게 회사와 직원 간
연봉계약을 맺는다. 실리콘밸리 직원 상당수는 전문직에 해당돼 근무시간과 관계없이 연봉과 성과급(주식·스톡옵션)을 받는다.
실리콘밸리 기업에 다니는 엔지니어들은 "임원뿐만 아니라 직원 개개인에게 책임과 결정권을 함께 주기 때문에 실패하면 자신의 커리어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업무시간도 프로젝트 진행 상황에 따라 스스로 조정한다. 무조건 많이 하거나 적게 하기 보다는 주인 의식을 가지고 프로젝트의 일정에 맡게 조정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처럼 많은 제도가 '일'에 최적화 돼 있고 직원의 '생산성'을 높이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족도가 상당히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을 하면서도 행복해 하는 이유는 회사가 잘 나가서가 유명해서가 아니다. 실리콘밸리
엔지니어들은 한결같이 “책임과 권한이 확실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켜서 하는 일이 없고 직장 상사를 위해,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하는 일은 없다. 더구나 선임자가 하던 대로
하는 방식도 용납하지 않는다. 모두 자발적으로 일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프로젝트가 성공할 때 보상이 확실할 뿐만 뿐만 아니라 공정한 평가가 뒤따른다. 때문에 실리콘밸리 직원들은 주 52시간이 아닌 주 70시간도 두렵지 않고 일을 해내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회사의 일이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그리고 자신의 성장과 회사의 성장을 일치시키고 여기에 '삶'까지 일치시킨다면 일을 하지 말라고 해도 알아서 할 것이다. '창업자'와 같은 정신을 가진 직원이 일하는 곳. 실리콘밸리의 본질이다.